박종하, 『틀을 깨라』 (해냄, 2011) 읽다.
자유의 조건 : 틀의 경계, 그 안고 밖.
나는 지극히 보수적이고, 겁 많은 사람이다. 낯선 일은 두렵고, 불확실하며, 그러므로 위험하다고 믿는다. 아니, ‘믿는다’라기보다는 그렇게 ‘여겨왔다’고 서술하는 것이 적당하다. 연역적 사고가 아닌, 귀납적 삶을 살았다. 즉 경험과 사례의 축적으로 선택의 값을 드로잉할 수 있는 삶. 그 상태에서 안전한 것, 덜 위험한 일, 많은 사람들이 선택한 방향에 따랐다. 초․중․고의 학창 시절과 방황의 대학 시절은 주어진 입력값에 대한 예상 가능한 결과값이었다. 확실히 나는 소심하고 겁 많은 보통의, 사람으로 분류된다.
이 책은 ‘무한 경쟁’이라는 이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서다. 나를 둘러싼 관성적 사고와 그 사고의 감옥으로부터 탈출하라는 필자의 제언은 타당하다. ‘규칙/정답/확실함/논리/진지함/감정/영역/경쟁/어제의 틀’을 깨는 것은 현재의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와의 대결에서 개인의 우위를 점령하라는 뜻일 게다. 세계에 순응할 때 개인은 안정적 삶을 보장받지만, 발전이 없다. 창조가 없다. 하지만 자아가 중심에 서 세계를 주변부로 둘 때, 즉 나를 둘러싼 패러다임을 스스로 변혁할 때 개인은 발전한다.
이런 종류의 책이 대개 그렇듯,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 귀결에는 함정이 있다. 이를테면 결과주의의 모순이다. 이 책에 제시된 여러 틀을 깬 모든 사람들에게 성공이 보장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세계의 질서에 편입되기를 거부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실패’라는 쓴잔을 마시며 분루를 삼키고 있을 개연성이 훨씬 많다. 이유는 성공한 사람은 그 수가 적기 때문이다. 사람은 많지만, 성공한 사람은 적기 때문이다. 기업은 많지만, 성공한 1등 기업은 적기 때문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무엇인가를 혁파하기 위해선 그 무엇인가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전제돼야 한다. 이 책에서 ‘규칙/정답/확실함/논리/진지함/감정/영역/경쟁/어제의 틀’을 깨기 위해선 ‘규칙/정답/확실함/논리/진지함/감정/영역/경쟁/어제의 틀’에 대한 완벽한 앎이 선행되어야 한다. 정답을 찾는 방법을 모르면서 오답 속에 정답의 개연성을 찾는 행위야 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다. 논리를 알지 못하면서 논리의 틀을 깨는 것은 말 그대로 어불성설이다. 즉, 대상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선행한 후 그 대상의 구속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이것이 바로 온전한 의미에서의 ‘틀을 깨’는 것이다. 판소리에 대해 다년 간 연습하고, 연습한 창자가 비로소 더늠을 할 수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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