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 『예술가의 방』 (서해문집, 2008) 읽다.
예술가의 방 : 모순 형용의 경계
먹고사니즘에 치여 문화가 뭔지 잊어 버렸다. 아니, 문화라는 추상적 형태의 단어가 상기하는 그 이미지만 있을 뿐, 사실 나는 문화에 대해 모르니 ‘잊어 버렸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단 한 번도 뮤지컬이나 오페라 구경도 못해 봤다. 가장 대중적이라 할 수 있는 영화조차도 고작 일 년에 서너 차례 볼 뿐이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고작 책권 따위나 심심풀이로 읽는 나와 ‘문화’ 사이의 현격하며 아득한 이 거리감.
MBC 아나운서 김지은이 현대 미술 작가 10인을 찾았다. 작가론적 차원에서 작품 비평을 하는 것이 아닌, 작가의 ‘방’을 중심으로 작가의 작품 세계, 그리고 한국 현대 미술의 트랜드를 소개한다. 물론 여기에 소개된 10인의 미술가들이 현대 미술을 대표성을 띤다고 말하긴 어렵다. 다만 미술이란 고전적 차원에서의 드로잉이나 채색, 석고상의 조각으로만 알고 있던 나는 이 책에서 현대 미술 작가들의 다양한 미술 기법을 알았다. 잭슨 폴록 등으로 위시하는 ‘해프닝’이나 앤디 워홀 등의 ‘팝 아트’가 이제는 더 이상 실험적인 미술 기법이 아니라는 것도.
사실 미술 작가들에게 회화나 조형, 조각은 하나의 방법적 선택일 뿐이다. 작가는 다양한 수단과 형식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형상화한다. 그것은 펜, 붓, 망치, 끌, 그리고 오브제로 수단은 열려 있다. 결국 정형화된 예술이란 지나치게 ‘낡은’ 것이 아닌가.
예이츠는 ‘예술이란 가족 유사성의 개념이다’라고 말했다. 아이는 부모의 유전자를 반반씩 물려 받았고, 형제 간에도 그 유전적 근연도는 1/2이다. 100% 일치하지 않는 유전적 근연도를 가졌을지라도 그들은 가족의 성원으로 분류할 수 있다. 예술이란 개념 역시 마찬가지다. 기존 예술의 클론만이 예술이라면 예술의 범주는 갈수록 협소해지고 결국 그는 사북자리에 설 게다. 열린 개념으로서 예술을 대하는 시각만이 현대 예술을 감상하는 바람직한 태도다.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을 경계 짓는 것, 그리고 그 경계의 벽을 허무는 것. 이 둘 사이가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일 것이다.
한편 이 책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방’이라는 공간이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좌표 위에 서 있는 한 점이다. 모든 인간은 이 좌표에 구속력에 복속될 수밖에 없다. 시간의 제약은 결국 ‘죽음’의 문제로 귀결되며, ‘공간’의 제약은 ‘생존 방법’과 대응한다. 예술가의 작품 세계를 면밀히 분석하는 데 지면의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면 이 책은 그저 그런 교양서로 분류되었을 것이다.
반면 이 책은 예술가의 ‘방’에 주목했고, 그것은 예술을 하는 예술가로서의 개인과 ‘생존’에 직면한 자연인으로서의 개인 사이의 갈등을 포착했다. 예술은 지상․현존으로부터 일탈, 자유를 꿈꾼다. 하지만 그 예술 행위의 주체는 필연적으로 ‘방’이라는 공간(이것은 신체일 수도 있다)에 제약된다. 아이러니다. 나는 ‘예술가의 방’이라는 제목에서의 모순 형용을 발견했다. 실제로 이 책의 많은 부분은 ‘먹고사니즘’을 묻는다. 명민한 기획의도와 제목 사이의 화음에서 나는 커튼 뒤의 적나라한 일상을 엿본다.
소개한 작가 중 손동현의 그림이 재밌었다. ‘한국화의 즐거운 진화’라는 타이틀인데 굳이 작가의 부연 설명을 듣지 않아도 한국적 초상화의 형식을 차용해서 현대적 모델(특히 서양-상품화된 캐릭터)을 그린 작가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외계인이투이선생상’이나 ‘영웅수파만선생상’이라는 작품 제목에서 손동현의 번뜩이는 재기를 느낀다. 고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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